“하랄은 스스로의 힘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 전역을 손에 넣었으며, 덴마크인을 기독교로 개종했도다.”
_엘링 비석의 비문에서
10세기 중반 덴마크, 바이킹의 왕 '푸른 이빨왕' 하랄(Harald Bluetooth)의 궁전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습니다. 왕은 독일에서 온 선교사 포포(Poppo)에게 기독교 신앙의 힘을 증명해 보이라고 도전했습니다. 잠시 후,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붙이를 든 포포가 왕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포포는 그 뜨거운 쇠를 맨손으로 들었음에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한 하랄 왕은 마침내 기독교 신의 권능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모든 덴마크인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과연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이며, 바이킹 왕의 개종 뒤에는 어떤 역사가 숨어 있을까요?
이 극적인 이야기는 967년경 독일의 수도사, 코르바이의 비두킨트가 기록한 연대기에서 전해집니다. 그는 이 기적을 행한 포포가 훗날 주교가 되었다고 덧붙였는데, 다른 역사 기록을 통해 실제로 포포라는 이름의 성직자가 961년 독일 뷔르츠부르크의 주교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랄 왕의 개종이 960년대 초반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물론 포포가 덴마크를 찾은 최초의 선교사는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도 많은 선교사가 북유럽의 이교도 신들을 버리게 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유독 포포의 선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단순한 기적 이야기 이상의 복잡한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었습니다.
포포의 선교 활동은 당시 독일의 왕이자 훗날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오토 1세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하랄 왕의 개종 결정은 순수한 신앙심보다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당시 하랄은 덴마크를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로 만들려는 야심에 찬 군주였습니다. 그는 왕국의 도로와 다리를 정비하고, 국경에 견고한 요새를 쌓아 남쪽의 강력한 이웃인 독일의 공격을 방어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그의 야망을 실현해 줄 매우 효과적인 도구였습니다.
첫째,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써 선진 문물을 가진 독일과의 외교적 마찰을 줄이고, 잠재적인 침략의 명분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둘째, '왕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온다'는 기독교의 교리는 덴마크 내 여러 부족 세력을 누르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이상적인 이념이었습니다. 하랄에게 기독교는 덴마크라는 나라를 하나로 묶고, 자신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였던 셈입니다.
자신의 개종과 통치 이념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하랄은 그의 재위 기간 중 수도였던 옐링(Jelling)에 거대한 비석을 세웁니다. 그의 아버지이자 이교도였던 고름 왕의 무덤 옆에 세워진 이 옐링 비석은 '덴마크의 출생 증명서'라고도 불리는 매우 중요한 유물입니다.
비석의 세 면에는 각각 다른 그림과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 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다른 한 면에는 뱀에 휘감긴 뿔 달린 짐승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 새로운 신앙(기독교)이 과거의 신앙(북유럽 이교)을 이겼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면에는 룬 문자로 다음과 같은 긴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랄 왕이 아버지 고름과 어머니 티라를 기리며 이 기념비를 세우도록 명했다. 이 하랄은 덴마크 전체와 노르웨이를 얻었으며, 덴마크인들을 기독교도로 만들었다."
이 비석은 하랄 왕이 자신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덴마크가 이제 이교도의 나라가 아닌 기독교 문명권의 일원임을 선언하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신의 기적으로 시작된 이야기든, 냉철한 정치적 결단이었든, 하랄의 선택은 덴마크를 바이킹의 시대에서 중세 유럽의 일원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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