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29년 1월 16일, 이베리아반도 남부를 지배하던 이슬람 왕조, 코르도바 아미르국의 통치자 아브드 알-라흐만 3세는 이슬람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중대한 선언을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아미르'가 아닌 '칼리프'라 칭하며, 기존의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칭호의 변경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의 권력 구도를 재편하고, 이슬람 스페인(알안달루스)의 역사를 최전성기로 이끈 위대한 서막이었습니다.
이 선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미르'와 '칼리프'라는 칭호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칼리프(Caliph)'는 '후계자'를 의미하는 아랍어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종교적·정치적 권위를 계승하는 이슬람 세계 전체의 최고 통치자를 뜻하는 칭호였습니다. 이론적으로 이슬람 세계에는 단 한 명의 칼리프만이 존재해야 했습니다.
반면 '아미르(Amir)'는 '사령관' 혹은 '총독'을 의미하는 칭호로, 본래 광대한 이슬람 제국의 지방을 다스리던 이들에게 부여되던 직책이었습니다. 9세기에 접어들어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중앙 권력이 약화되자, 각지의 아미르들은 사실상의 독립 군주처럼 자신들의 영토를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코르도바의 아브드 알-라흐만 3세 역시 이러한 독립적인 아미르 중 한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비록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을지언정,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 지주인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종교적 권위만큼은 감히 넘보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슬람 세계의 통합이라는 이상은 명목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아바스 왕조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최초의 균열은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910년,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파티마 왕조의 지배자가 스스로를 칼리프라 선언한 것입니다. 이로써 이슬람 세계에는 바그다드와 이집트, 두 명의 칼리프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티마 왕조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여기는 시아파였습니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수니파 무슬림들에게 그들은 이단적인 존재로 여겨졌기에,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선언은 그 영향력이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르도바의 아브드 알-라흐만 3세가 칼리프를 선언한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충격이었습니다. 그는 수니파 지배자로서는 최초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더 이상 복종하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선포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로써 이슬람 세계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프(수니파),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프(시아파), 그리고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칼리프(수니파)라는 세 명의 최고 지도자가 각축을 벌이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아브드 알-라흐만 3세가 칼리프를 칭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명분은 바로 그의 혈통에 있었습니다. 그는 661년부터 750년까지 이슬람 세계 전체를 다스렸던 정통 칼리프 왕조, 우마이야 왕조의 직계 후손이었습니다.
본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두었던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 아바스 가문이 일으킨 혁명으로 처참하게 몰락했습니다. 당시 왕족 대부분이 학살당했지만, 단 한 명의 왕자였던 '아브드 알-라흐만 1세'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머나먼 이베리아반도까지 도망쳤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여 756년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는 후기 우마이야 왕조, 즉 코르도바 아미르국을 세웠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비록 '아미르'라는 칭호에 만족해야 했지만, 언젠가 조상들의 영광이었던 '칼리프'의 지위를 되찾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브드 알-라흐만 3세의 선언은 바로 그 170여 년간 이어진 숙원의 완성이었습니다.
새로운 칼리프가 된 아브드 알-라흐만 3세는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수도이자 궁전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코르도바 외곽에 '빛나는 도시'라는 의미의 '마디나트 알자하라(Madinat al-Zahra)'라는 거대한 궁전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이는 과거 조상들이 다스렸던 다마스쿠스의 웅장한 궁전을 재현하고, 나아가 바그다드와 이집트의 칼리프들을 압도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긴 대규모 프로젝트였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 코르도바 칼리프국은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황금기를 맞이했습니다. 코르도바는 당시 유럽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으며, 의학,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이 발달하여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를 잇는 지식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008년, 그의 사후 강력한 지도자가 사라지자 칼리프국은 극심한 내전에 휩싸였고, 결국 수많은 작은 이슬람 왕국들(타이파)로 분열되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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