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레드와 구드룸은 색슨 지배 잉글랜드와 데인로 사이의 국경을 다시 정한다.”
에딩턴에서의 기적적인 승리 이후, 잉글랜드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습니다. 데인족의 왕 구드룸은 앨프레드의 대자가 되어 기독교로 개종했고, 다시는 웨식스를 넘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바이킹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885년, 평화 조약은 휴지 조각처럼 찢어졌습니다. 구드룸은 약속을 깨고 대군을 이끌고 켄트 지역을 침공하며 다시 한번 앵글로색슨의 땅을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앨프레드는 과거 늪지대를 헤매던 도망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잉글랜드의 유일한 희망이자, 노련한 전략가였습니다.
바이킹의 재침공 소식에 앨프레드는 즉각 대응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는 적의 주력군이 있는 켄트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두의 예상을 깨고 템스 강을 따라 북상하여 당시 데인족의 지배하에 있던 런던을 점령해버렸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습니다. 런던은 잉글랜드 남부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을 빼앗기자 데인족은 남부에 머무를 이유를 잃고 본거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앨프레드는 최소한의 전투로 적의 심장부를 꿰뚫어 전쟁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것입니다.
결국 구드룸은 다시 한번 앨프레드에게 무릎을 꿇었고,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명확한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역사에 '앨프레드와 구드룸의 조약'이라 기록된 이 협약은 잉글랜드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조약에 따라 런던은 공식적으로 웨식스의 영토가 되었고,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와 데인족이 점령한 땅 사이에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졌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으로 둘로 나뉘었습니다. 선의 남쪽과 서쪽은 앨프레드가 다스리는 앵글로색슨의 땅, 웨식스 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의 북쪽과 동쪽은 데인족, 즉 바이킹의 법과 관습이 지배하는 땅, '데인로(Danelaw)'가 되었습니다.
데인로는 사실상 잉글랜드 안에 세워진 바이킹의 왕국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데인족 군사 귀족들은 자신들의 법으로 주민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들이 이 지역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습니다. 과거 앵글로색슨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수도원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글을 읽고 쓰는 문화 역시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흔적은 잉글랜드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York) 주변이나 링컨셔, 이스트앵글리아 지역에는 '-by'(마을), '-thorpe'(작은 촌락)와 같이 스칸디나비아어로 끝나는 지명이 집중적으로 발견됩니다. 또한, 켈트나 앵글로색슨의 전통과는 다른 독특한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으로 장식된 돌십자가들은 이곳이 한때 바이킹의 땅이었음을 뚜렷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원래 살던 앵글로색슨 주민들과 얼마나 동화되어 살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국경선이 확정되자, 웨식스는 명실상부 잉글랜드의 유일한 희망이자 실질적인 지배 세력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앨프레드가 89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데인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지만, 그는 더 이상 수세에 몰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웨식스의 생존을 넘어, 미래를 위한 중요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바로 '부르(Burhs)'라 불리는 요새화된 방어 도시 네트워크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는 웨식스 전역에 약 30개의 부르를 건설했는데, 이곳들은 평시에는 시장이 열리는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주변 주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견고한 피난처이자 상설 주둔군이 머무는 군사 기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borough'로 끝나는 영국의 많은 도시 이름들이 바로 이 '부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정책은 왕국의 방어력을 극적으로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상업의 발전을 촉진하는 놀라운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앨프레드의 혜안은 육지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이킹의 위협이 근본적으로 바다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해안을 통한 기습적인 약탈을 막기 위해, 그는 기존의 앵글로색슨 배보다 훨씬 크고 빠른 새로운 형태의 군함을 여러 척 제작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바이킹의 롱쉽에 맞서기 위해, 바이킹의 배보다 더 우수한 배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체계적인 잉글랜드 해군의 시작이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앨프레드는 오늘날 '영국 해군의 창설자'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습니다. 그는 위협의 근원을 찾아내고, 그것을 힘으로 제압할 줄 아는 진정한 전략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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