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왕은 데인족을 물리치고, 그의 긴 통치 기간의 특징인 단호한 결단력을 보인다.”
9세기 후반, 잉글랜드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쪽에서 몰아닥친 이교도 군대, '데인족(Danes)'이라 불리던 바이킹의 대군세(Great Heathen Army)가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7개의 왕국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섬브리아, 이스트앵글리아, 머시아 왕국이 차례로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고, 이제 잉글랜드의 마지막 보루는 남부의 웨식스 왕국뿐이었습니다. 왕국의 운명이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던 바로 그 순간, 역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 젊은이를 왕좌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앨프레드(Alfred), 훗날 잉글랜드 역사상 유일하게 '대왕(The Great)'이라 불리게 될 인물이었습니다.
앨프레드가 왕위를 이어받은 871년은 웨식스 역사상 가장 암울한 해였습니다. 그의 형이자 국왕이었던 애설레드(Æthelred)와 함께 왕국의 생존을 건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죠. 870년 겨울부터 871년 봄까지, 불과 몇 달 사이에 웨식스 군대는 데인족과 무려 다섯 차례의 대규모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승리와 패배가 교차하는 혈전 속에서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바이킹의 공세는 멈출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871년 4월, 계속되는 전투 속에서 국왕 애설레드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어린 아들이 있었지만,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선 이 시점에서 어린아이에게 왕국을 맡길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귀족과 지휘관들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로 향했습니다. 바로 스물두 살의 젊은 왕자, 앨프레드였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는 이미 수많은 전투를 통해 강철처럼 단련된 지휘관이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렇게 앨프레드는 형의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왕관을 쓰고, 불타는 왕국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앨프레드에게는 슬픔에 잠길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위 후 불과 몇 달 만에, 웨식스 영토 곳곳에서 바이킹과 아홉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더 치러야 했습니다. 이는 거의 매주 전투가 벌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살인적인 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앨프레드는 지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탁월한 전략으로 바이킹의 예봉을 꺾고, 때로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맹렬한 반격으로 그들을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앨프레드의 끈질기고 맹렬한 저항에 혀를 내두른 바이킹은 웨식스를 정복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마침내 웨식스에서 물러나, 상대적으로 저항이 덜한 이웃 머시아 왕국으로 목표를 돌렸습니다. 앨프레드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왕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바이킹은 5년 뒤 더욱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지만, 이 5년이라는 시간은 앨프레드가 무너진 왕국을 재건하고 더 큰 싸움을 준비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실 앨프레드는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849년, 웨식스의 애설울프(Æthelwulf) 왕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네 명의 형들이 있었기에, 그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해 보였습니다. 당시 웨식스 왕국은 앨프레드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 템스 강 이남의 잉글랜드 전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패권 국가로 자리 잡은 상태였습니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왕자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고립된 섬나라가 아니라, 유럽 대륙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어린 앨프레드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앨프레드는 어린 시절, 853년과 855년 두 차례에 걸쳐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찬란한 고대 로마의 유적과 수준 높은 대륙의 학문, 문화를 직접 접한 이 경험은 어린 왕자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학문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키웠고, 이는 훗날 그의 통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대부분의 중세 군주들이 글조차 읽지 못했던 것과 달리, 앨프레드는 라틴어에 능통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왕국의 안정을 되찾은 후, 전쟁으로 황폐해진 잉글랜드의 학문과 교육을 부흥시키기 위해 직접 라틴어 고전을 앵글로색슨어(고대 영어)로 번역하는 위대한 사업을 주도했습니다. 그가 번역한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목회 지침>은 성직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지침서가 되었고, 특히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어, 평생을 전쟁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는 책만 읽는 유약한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왕자로서 받아야 할 군사 훈련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고, 이때 익힌 전술과 전투 기술은 훗날 그가 잉글랜드 최고의 명장으로 성장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학자의 지성과 전사의 용맹함을 겸비한 그의 특별함이야말로, 절망의 시대가 그를 왕으로 선택한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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