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마뉴의 제국이 베르됭 조약에 의해 분할된다.”
서유럽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통일 제국을 건설한 인물, 샤를마뉴(Charlemagne)는 자신이 사망한 후 프랑크 제국을 세 아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샤를마뉴보다 오래 산 아들은 단 한 명, 경건왕 루이(Louis the Pious)뿐이었습니다. 그는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한 뒤 제국 전체를 단독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나 루이는 자신의 신앙적 신념과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깊이 믿는 인물이었고, 프랑크 왕국의 오랜 전통이었던 유산 분할 상속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경건왕 루이는 817년, 맏아들 로타르 1세를 제국의 유일한 상속자로 지명하며 기존의 분할 상속 관행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이 결정은 단순히 권력 집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제국의 통일성 유지라는 이상을 실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두 아들, 루트비히(독일왕 루이)와 페팽에게는 상징적인 권한만 부여된 소왕국(sub-kingdoms)이 주어졌습니다. 이는 곧 형제 간의 긴장과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루이의 제1부인 이르멘가르트가 사망한 뒤, 그는 제2부인 유디트(Judith)와 재혼했고, 이들 사이에서 샤를(후일의 대머리왕 샤를)이 823년에 태어났습니다. 유디트는 자신의 아들도 적절한 상속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기존의 상속 체계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로타르와 다른 아들들은 샤를의 등장이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왕실 내부에서는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습니다. 경건왕 루이는 재위 기간 내내 모든 자식이 수용할 수 있는 유산 배분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했으나, 끝내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채 840년에 사망하게 됩니다.
루이의 사망 직후, 로타르는 제국 전체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시도했습니다. 이에 루이와 샤를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고 로타르에 맞섰으며, 841년 퐁트누아(Fontenoy) 전투에서 그를 물리쳤습니다. 이 전투는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닌, 샤를마뉴의 제국이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형제 간의 내전 끝에, 843년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이 체결되며 샤를마뉴의 제국은 세 부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조약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조약은 단순한 분할 행위가 아니라, 훗날 프랑스·독일·이탈리아의 형성과 민족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베르됭 조약은 단순한 정치적 타협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샤를마뉴 제국의 통합이 이상에 불과했음을 보여준 사건이며, 그로부터 유럽 중세의 지역 분권 시대가 본격화됩니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벌어지는 영토 분쟁과 왕위 계승 분쟁의 뿌리가 바로 이 조약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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