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바이킹의 습격은 카롤링거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한다.”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위대한 샤를마뉴 대제의 카롤링거 제국. 하지만 그의 시대가 저물고, 제국은 손자들에 의해 세 조각으로 갈라져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혼란과 분열의 시기, 북쪽의 차가운 바다로부터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을 재앙이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용의 머리를 뱃머리에 새긴 날렵한 배, 롱쉽(Longship)을 타고 나타난 잔혹한 약탈자, 바로 바이킹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닿은 곳은, 서프랑크 왕국의 심장부, 파리였습니다.
서기 845년 3월,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 했습니다. 평화롭기만 하던 센 강 위로 무려 100척에 달하는 바이킹의 롱쉽이 끝없이 이어지며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안개를 뚫고 나타나, 강변의 모든 마을과 수도원을 닥치는 대로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죽음과 파괴만이 뒤따랐고, 공포에 질린 비명은 제국의 나약함을 비웃는 듯했습니다.
당시 서프랑크의 왕은 샤를마뉴의 손자, '대머리왕 샤를(Charles the Bald)'이었습니다. 하지만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할아버지와 달리, 그는 분열된 왕국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고, 귀족들의 반목 속에서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북쪽에서 밀려오는 이 재앙 앞에서 그의 군대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바이킹은 그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마치 자신들의 안방에 들어가듯 유유히 센 강을 거슬러 파리로, 파리로 진격했습니다. 제국의 방어선은 종이 호랑이에 불과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바이킹은 도시를 무자비하게 유린했습니다. 웅장하고 성스러웠던 교회들은 신성 모독의 대상이 되었고, 수많은 예술품과 성물들이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거리에는 시민들의 시신이 나뒹굴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바이킹의 노예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약탈의 현장이자, 절망의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 끔찍한 시련은 대머리왕 샤를이 굴욕적인 약속을 하고 나서야 끝이 났습니다. 그는 바이킹에게 무려 7,000 리브르(약 2,570kg)의 은이라는 막대한 양의 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는 '데인겔트(Danegeld)'라 불리는 바이킹의 전통적인 '몸값' 요구였습니다. '싸워서 지키지 못하겠다면, 돈으로 평화를 사라'는 그들의 방식에 제국이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막대한 전리품과 수백 명의 포로를 챙긴 바이킹은 그제야 만족한 듯 파리에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도 해안 지방의 도시들을 차례로 약탈하며 마지막까지 탐욕을 채웠습니다.
845년의 악몽은 결코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한번 제국의 나약함을 맛본 바이킹에게 서프랑크 왕국은 언제든 찾아와 돈과 재물을 빼앗아 갈 수 있는 '현금 인출기'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수많은 강이 내륙 깊숙이까지 그물처럼 연결된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와 게르마니아(독일) 지역은 롱쉽을 이용하는 바이킹에게는 완벽한 침략 통로였습니다.
파리는 860년대에만 세 차례나 더 공격을 당했고, 그때마다 왕은 막대한 데인겔트를 지불하며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거의 매년 반복되는 습격에 왕국의 재정은 바닥났고,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한 왕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반복되는 굴욕 속에서 대머리왕 샤를은 마침내 결단을 내립니다. 더 이상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864년 '피스트르 칙령(Edict of Pîtres)'을 발표하며 대대적인 국방 개혁에 착수합니다. 이 칙령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기동성이 뛰어난 대규모 기병대를 창설하여 바이킹의 신속한 약탈에 대응하는 것. 둘째, 센 강을 비롯한 주요 강 곳곳에 요새화된 다리를 건설하여 바이킹 롱쉽의 내륙 진입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임시방편이 아닌, 국가 시스템 자체를 바이킹의 위협에 맞서도록 재편하는 근본적인 대책이었습니다. 비록 너무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이 조치는 훗날 파리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샤를의 개혁이 진정한 시험대에 오른 것은 885년이었습니다. 역사상 최대 규모로 추정되는 수백 척의 배와 수만 명의 바이킹 대군이 다시 한번 파리를 향해 밀려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파리는 과거의 파리가 아니었습니다. 과거 샤를이 건설했던 요새화된 다리들이 바이킹 함대의 앞을 가로막았고, 파리의 시민들은 파리 백작 '외드(Odo)'의 지휘 아래 결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포위 공격은 1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바이킹은 온갖 공성 무기를 동원해 성벽을 공격했지만, 파리 시민들은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도 끈질기게 버텨냈습니다. 이 위대한 저항은 유럽 전역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파리는 더 이상 바이킹에게 쉽게 무너지는 도시가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비록 당시 왕이었던 '비만왕 샤를'이 또다시 데인겔트를 지불하고 바이킹을 돌려보내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지만, 파리를 지켜낸 영웅 외드는 백성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결국, 반복되는 바이킹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한 카롤링거 왕조의 무력함은 그들의 종말을 재촉했습니다. 백성들은 무능한 왕 대신, 자신들의 땅을 직접 지켜낸 용감한 지방 영주들에게 충성을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885년의 영웅, 외드의 동생을 시조로 하는 카페 왕조가 들어서며 프랑스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바이킹의 도끼가 카롤링거 왕조의 숨통을 끊고 새로운 프랑스의 탄생을 이끈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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