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세례를 받고 그의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역사에는 때로 한 사람의 선택이 한 민족의 운명을 통째로 바꾸는 극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10세기 말, 키예프 루스(Kyivan Rus')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Vladimir I)의 개종은 바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7명의 아내와 수많은 첩을 거느리고, 심지어 인신공양까지 주관했던 이교도 군주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기독교의 성인이 되었을까요? 이것은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닌, 제국과 제국이 맞부딪히는 지정학적 게임과 한 남자의 야망이 얽힌 거대한 드라마였습니다.
블라디미르 1세가 키예프의 대공으로 즉위한 980년, 루스 땅은 다양한 슬라브 토착 신앙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선대인 이복형 야로폴크 시절에는 이미 많은 주민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블라디미르가 형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으면서 키예프는 다시 이교 신앙의 시대로 회귀했습니다.
새로운 군주 블라디미르는 열렬한 이교 숭배자였습니다. 그는 수도 키예프의 언덕에 천둥의 신 페룬(Perun)을 비롯한 여러 신의 조각상으로 가득한 새로운 신전을 짓고, 심지어 인신공양 의식에 직접 참여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왕국 주변은 이미 이슬람, 유대교, 가톨릭, 그리고 비잔틴 정교회 등 강력한 일신교 국가들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그리고 분열된 부족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블라디미르는 통일된 종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나라에 가장 적합한 종교를 '선택'하기 위해 각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사절단은 이슬람을 믿는 볼가 불가르, 유대교를 믿는 하자르, 그리고 로마 가톨릭을 믿는 게르만, 마지막으로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습니다.
보고는 흥미로웠습니다. 이슬람은 할례와 돼지고기 및 술을 금지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유대교는 나라를 잃고 흩어져 사는 민족의 종교라는 점이 걸렸습니다. 게르만의 로마 가톨릭 성당은 너무 수수하고 장엄함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사절단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황홀한 예식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늘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상에는 그런 장관이나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것을 좋아했던 블라디미르의 마음은 비잔틴의 동방 정교회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전설과는 별개로, 블라디미르의 개종에는 매우 현실적인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987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반란군 때문에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블라디미르에게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블라디미르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겁니다. 바로 황제의 여동생인 안나 공주(Anna Porphyrogenita)와 결혼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 세계에서 상상하기 힘든 요구였습니다. '보랏빛 방에서 태어난' 신성한 황제의 핏줄을 야만인 군주에게 내준다는 것은 비잔틴으로서는 엄청난 굴욕이었습니다.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블라디미르는 군대를 이끌고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크림 반도의 케르소네소스(오늘날의 세바스토폴)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한 바실리우스 2세는 결국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단,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습니다. 블라디미르가 기독교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블라디미르는 제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988년 케르소네소스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키예프로 돌아와 가장 먼저 자신이 세웠던 이교 신전들을 파괴하고 우상들을 부숴 드네프르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키예프 시민들에게 강으로 나아와 비잔틴 양식의 세례를 받으라고 명했습니다.
블라디미르의 이 선택은 키예프 루스를 넘어, 훗날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로 이어지는 동슬라브 민족 전체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이로써 루스는 비잔틴이라는 선진 문명권에 편입되었고, 슬라브족의 땅에서 로마 가톨릭의 확산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의 정치적 야망과 종교적 결단이 동유럽의 문화적, 종교적 지도를 완전히 새로 그린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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