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곧 죽을 것이며, 지상에서 그대를 묻기에 충분한 넓이의 땅만을 소유하게 될 것이오.”
_인도의 현자 단다미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했던 말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의 수많은 정복 여정 끝에 바빌론에 도달했습니다. 당시 32세였던 그는 여전히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계 정복의 꿈을 품고 있던 그는 이미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 북서부까지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복 욕망은 결코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아라비아 반도를 침략하기 위한 함대 파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이후 리비아와 카르타고, 더 나아가 서부 지중해 연안까지 정복할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바빌론은 고대 세계의 중심지로, 네부카드네자르 시대의 영광을 간직한 웅장한 도시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도시를 그의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으려 했고, 도시의 재건과 확장을 위한 계획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고, 도시의 방어 체계를 강화하며, 도시의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323년 5월 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가까운 친구이자 장군인 메디우스와 함께 긴 연회를 즐겼습니다.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우울증에 시달렸던 알렉산드로스는 자주 술에 의존했고,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셨고, 알렉산드로스는 만취 상태에서 연회장을 떠났습니다.
5월 29일, 연회 다음 날 아침, 알렉산드로스는 심한 열과 복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이미 인도 원정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고, 잦은 전투와 상처, 과도한 음주로 인해 체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한 숙취로 여겼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고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군사적, 행정적 의무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상에서도 장군들과 회의를 계속했고, 필요할 때면 침대를 운반하도록 해 군대에 직접 명령을 내리곤 했습니다. 그는 또한 바빌론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교 의식도 주관했으나, 병세가 악화되면서 이마저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주치의들은 그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시 의학 지식에 따라 그들은 피를 빼는 방법, 약초를 이용한 치료, 그리고 다양한 약제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치료법들은 아마도 그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체액을 제거하는 치료법은 이미 탈수 상태에 있던 그의 몸에 더 큰 부담을 주었을 것입니다.
약 2주간의 투병 끝에, 기원전 323년 6월 10일(혹은 11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궁전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위대한 군주는 단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즉시 여러 소문과 음모론을 낳았습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바빌론 전역에 퍼졌고, 이는 2,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독살설의 주요 용의자로는 안티파테르와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지목되었습니다. 안티파테르는 알렉산드로스가 유럽 원정 동안 마케도니아의 섭정으로 있었으나, 알렉산드로스가 귀환한 후 그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여겨져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또 다른 설은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중 하나인 안티고노스가 독살에 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의 일부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모든 정황을 고려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자연사했다는 견해를 지지합니다. 여러 역사 문헌을 분석한 결과, 그의 증상은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같은 열병과 일치합니다. 특히 말라리아는 바빌론 지역에서 흔했던 질병으로, 알렉산드로스가 보인 고열, 오한, 탈수, 의식 변화 등의 증상과 매우 유사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또한 그가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 질환이나 췌장염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제기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과도한 음주로 유명했으며, 특히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음주가 더욱 심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상태가 악화되자, 6월 9일, 그의 충직한 마케도니아 노병들은 마지막으로 그들의 지도자 앞을 행진했습니다. 이미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힘겹게 손을 들어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감동적인 장면은 병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겼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장군 페르디카스에게 자신의 반지를 건네주었습니다. 이 행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으며, 많은 이들은 이를 권력 이양의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로스의 왕비 록사나는 임신 중이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직접 물었습니다. "누구에게 제국을 물려주시겠습니까?" 알렉산드로스의 대답은 간단했지만 모호했습니다: "가장 강한 이에게(To the strongest)." 이 말은 이후 수십 년간 벌어질 치열한 권력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실제로는 "크라테로스에게(To Craterus)"라고 말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신뢰했던 장군 중 하나였지만, 당시 그는 마케도니아에 있었기 때문에 이 모호함이 발생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알렉산드로스의 마지막 유언은 그의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다음 날, 그의 장수들은 권력 공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를 두고 즉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두 가지 주요 의견이 대립했습니다. 한쪽은 페르디카스를 중심으로 록사나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 그 아이가 남자라면 왕위를 물려주자는 입장이었고, 다른 한쪽은 알렉산드로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다이오스(나중에 필립 3세로 불림)에게 즉시 왕위를 넘기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타협안으로, 아리다이오스와 록사나의 아이(나중에 태어난 알렉산드로스 4세)가 공동 통치자가 되고, 페르디카스가 섭정으로서 제국을 다스리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주요 장군들은 각자 제국의 일부를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고, 이는 곧 '디아도코이(후계자들)' 전쟁이라 불리는 긴 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은 약 50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알렉산드로스의 방대한 제국은 세 개의 주요 왕조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 세 왕조는 헬레니즘 시대를 이끌었으며, 그리스 문화와 동방 문화의 융합을 촉진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꿈꾸었던 통합된 세계 제국의 비전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은 그의 죽음 후 향료로 처리되어 보존되었습니다. 이집트식 미라 제작 기술이 사용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화려한 황금 관에 안치되었습니다. 원래 그의 시신은 마케도니아의 왕족 묘지인 아이가이에 묻힐 예정이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로 운반하여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은 결국 그가 설립한 위대한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안치되었습니다. 그의 무덤은 '소마(Soma)'라고 불렸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무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와 로마 시대까지 중요한 순례지였으며,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하드리아누스와 같은 로마 황제들도 이곳을 방문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3세기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무덤에 대한 기록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지진, 전쟁, 도시의 변화로 인해 무덤의 위치가 잊혀졌고, 오늘날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계속해서 그의 무덤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성과는 없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짧은 생애와 갑작스러운 죽음은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세계 역사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정복은 동서양의 문화 교류를 촉진했고, 그리스 문화가 중동과 중앙아시아, 인도 북부에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제국은 비록 그의 죽음 후 분열되었지만, 헬레니즘 문화라는 유산을 남겼고, 이는 로마 제국 시대와 그 이후까지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30여 개의 도시를 건설했으며, 이 중 많은 도시들은 오늘날까지도 존재합니다.
그는 또한 후대의 많은 군사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카이사르, 한니발, 나폴레옹, 심지어 현대의 군사 전략가들까지도 그의 전술을 연구하고 본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위대함'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세계 정복이라는 개념의 원형을 제시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은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 업적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비전을 가졌으며, 이는 오늘날 세계화와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후의 제국 분열은 역설적으로 그의 비전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비록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2,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삶과 업적, 그리고 죽음은 인류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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