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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네부카드네자르 2세 : 유대인의 추방과 바빌론의 영광

역사학

by danielsung 2025. 3. 12.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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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빌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137편)

 

 

 

세계의 역사를 재미있게 알아보는 11번째 시간,

이번 시간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유대인 바빌론 유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바빌론

 

 

 

강대국 바빌론과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야망

 

기원전 605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한 칼데아 왕조의 위대한 군주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는 특히 레반트 지역을 장악하려 했으며, 이러한 정복 활동의 일환으로 기원전 597년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당시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601년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자신에게 충성하던 속국들의 신뢰를 잃고 있었습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반란의 조짐이 있던 유다를 공격했고, 왕 여호야긴을 포함한 약 1만 명의 유대인을 바빌론으로 강제 추방했습니다. 이는 역사에서 ‘바빌론 유수’로 알려진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유다의 반란과 성전의 파괴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의 지배가 유다에서 완전히 확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의 새로운 왕 시드기야는 기원전 587년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대한 응징으로 네부카드네자르는 더욱 강력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유대교 신앙의 중심이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대규모의 유대인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으며, 이는 유대 역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한 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바빌론 유수와 유대인의 신앙적 변화

 

유대인들에게 바빌론 유수는 단순한 정치적 비극이 아니라 신앙적인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유대의 신 야훼는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추방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 인물들이 바로 예언자 예레미아와 에스겔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신의 뜻을 거스르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이러한 벌을 받게 되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대교 신앙은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고, 유일신 신앙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후대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학에도 영향을 미친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바빌론의 또 다른 얼굴: 공중 정원의 전설

 

네부카드네자르는 전쟁과 정복뿐만 아니라 건축과 문화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유산 중 하나는 ‘바빌론의 공중 정원’입니다. 이 정원은 그의 아내 아미티스를 위해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힙니다.

 

비록 오늘날까지 그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전설에 따르면 이 정원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거대한 구조물로, 다양한 식물과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바빌론이 단순한 군사적 강국이 아니라 예술과 건축에서도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음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서 재조명되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을 파괴하고 민족을 추방한 정복자로 기억되지만, 바빌론에서는 위대한 군주로 평가됩니다. 그는 바빌론을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으며, 도시를 견고한 성벽과 아름다운 건축물로 장식했습니다.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과 공중 정원은 그가 남긴 찬란한 유산 중 일부일 뿐입니다.

 

그의 업적과 유산은 오늘날에도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며, 바빌론 문명의 화려한 전성기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정복자와 건축가, 그리고 유대인의 운명을 바꾼 강력한 왕으로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야기는 여전히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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