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루스를 일으키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사로잡힌 내 백성을 놓으리라.”
(이사야 45장 13절)
세계의 역사를 재미있게 알아보는 12번째 시간,
이번 시간에는 '키루스 대왕의 유대인 해방'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원전 597년,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유다 왕국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이는 역사적으로 '바빌론 유수'로 불리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당시 신바빌로니아 왕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하며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여러 주변국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빌론의 문화적, 종교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신앙과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단순히 유다를 정복한 것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파괴했습니다. 성전의 보물과 귀족층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 종속시켰으며, 유다 왕국의 왕족과 지도층 인사들도 대부분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는 유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들의 신앙과 정체성에도 심각한 도전을 안겼습니다.
유대인들의 운명은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키루스 2세(키루스 대왕)가 바빌론을 정복하면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이미 기원전 549년 메디아를 정복하여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까지 정복하면서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의 정복 전략은 군사적인 힘뿐만 아니라, 정복한 지역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는 유화 정책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기원전 539년 10월 12일, 키루스는 바빌론을 공격하여 바빌로니아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후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을 돌려 바빌론 성 안으로 진입하면서 큰 유혈 사태 없이 도시를 장악했습니다. 바빌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는 자신의 사제층의 지지를 잃은 상태였고, 결국 패배하여 왕좌에서 쫓겨났습니다.
바빌론을 정복한 키루스 대왕은 즉시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인도주의적 결정이 아니라, 키루스가 정복한 지역에서 민족들의 전통적인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며 제국의 안정을 꾀하는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그의 정책은 ‘키루스 칙령(Cyrus Cylinder)’으로 알려진 기록에도 나타납니다. 이 칙령은 바빌론 점령 이후 키루스가 공표한 정책을 담고 있으며, 정복한 지역의 신전과 예배 전통을 회복시키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바빌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약 4만 명에 달했으며, 대부분이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들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약탈해 간 재물을 되찾아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성전을 재건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왕국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는 허가는 받지 못했고, 페르시아 제국의 행정 구역 내에서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형태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유배 기간 동안 그들의 땅에는 다른 민족들이 정착해 있었고, 유대인과 다른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마리아인 사이의 긴장이 심화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 또한 유대 신앙의 일부를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들을 순수한 신앙을 유지하지 못한 자들로 간주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깊어졌고, 신약 성경 시대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유배 생활 동안 자신들만의 장로 체계를 발전시켰으며, 히브리 문자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의 경험을 통해 종교적 율법과 전통을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이를 기반으로 후대의 유대교가 발전하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키루스를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해 준 인물로 기억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키루스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로 묘사하는 구절이 있으며, 이는 이방 왕 중 유일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정책은 단순히 유대인들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 전반에 걸쳐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는 체계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후대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 제국의 통치 방식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습니다.
바빌론 유수는 유대 역사에서 가장 큰 시련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신앙과 문화의 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키루스 대왕의 개입으로 유대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이는 유대교의 지속성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키루스의 통치 방식은 이후의 제국들이 종교적 관용을 정책적으로 채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리더십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결국, 바빌론 유수와 키루스 대왕의 해방 조치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 신앙의 시험과 회복,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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