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의 권위로 그대에게 프랑크의 왕위를 내리노라.”
_교황 자카리아스가피핀 3세에게 한 답신, 750년
8세기 중반, 유럽은 정치적 격변 속에 있었다. 753년 11월, 교황 스테파누스 2세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린다. 그는 로마를 떠나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향한다. 교황이 직접 알프스를 넘는 일은 전례 없는 일이었고, 이는 그만큼 절박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랑고바르드족의 침공으로 로마가 위협받고 있었고,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없는 무력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교황은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야 했고, 그 선택은 프랑크족의 지도자 피핀 3세였다.
이 시기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의 이름만 남아있을 뿐 실질적인 권력은 궁재(Mayor of the Palace)에게 있었다. 피핀 3세는 메로빙거 왕조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의 궁재로, 이미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751년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정치적 정당성을 묻는 사절을 보냈다: "실제로 통치하는 자가 왕이 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교황은 동의의 뜻을 보냈고, 피핀은 이를 명분 삼아 힐데리히를 폐위시켰다. 같은 해 11월, 그는 교황의 사절인 보니파키우스 대주교로부터 성유를 받으며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것이 바로 카롤링거 왕조의 시작이다.
교황 자카리아스의 뒤를 이은 스테파누스 2세는 753년 말, 피핀과의 군사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직접 프랑크 왕국을 방문한다. 754년 1월 6일, 그들은 파리 남쪽 퐁티옹(Ponthion)에서 회동했고, 피핀은 랑고바르드족을 상대로 군사 행동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 이 만남은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 사이에 새로운 정치-군사적 연대를 형성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 스테파누스는 6월 파리 근교 생 드니(Saint-Denis) 수도원에서 피핀과 그의 아들들인 카를(훗날 샤를마뉴)과 카를로만에게 성유를 부어 왕위를 축복했다. 이로써 피핀은 신성한 권위를 부여받은 왕이 되었고, 그의 후계자들도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피핀은 약속을 지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랑고바르드족의 왕 아이스툴프를 격퇴하고, 점령당한 라벤나를 되찾았다.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의 총주교 대리령이었던 라벤나와 그 주변 지역이 교황에게 기증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서 교황령(Papal States)의 기원이 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후 수세기 동안 교황은 이 지역을 바탕으로 세속 권력까지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는 중세 유럽 정치사에서 교황의 위상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피핀 3세와 교황 스테파누스 2세의 동맹은 단순한 군사 지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세속 권력과 성속 권력의 연합이자, 교황이 단순한 종교적 수장을 넘어 정치적 행위자로 부상한 사건이었다. 또한, 이 동맹은 샤를마뉴로 이어지는 카롤링거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향후 신성로마제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황이 알프스를 넘은 그 여정은 결국 중세 유럽의 정치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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