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승리가 중앙아시아에서 중국(당나라)의 팽창 계획을 막는다.”
8세기 중엽, 중앙아시아는 두 강대 세력의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당나라의 팽창주의, 다른 한편에는 빠르게 성장하던 이슬람 세력이 있었습니다. 751년 탈라스 전투는 이 두 문명이 정면으로 충돌한 역사적 순간이자, 향후 중앙아시아의 정치·종교적 지형을 바꿔놓은 중대한 사건입니다.
이 전투에서 아랍-투르크 연합군은 당나라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이슬람은 중앙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반면 당나라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하게 됩니다.
당 태종(재위 628~649년) 시기, 중국은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실크로드의 주요 통상 거점들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닌, 중국과 중동, 지중해를 잇는 국제 교역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습니다.
8세기 초까지 당나라는 힌두쿠시 산맥에 이르는 약 1,610km에 달하는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타슈켄트와 같은 도시들을 점령하며 중앙아시아에서의 존재감을 키웠습니다.
반면, 7세기 말부터 이슬람화된 아랍인들 또한 중앙아시아로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710년경, 이들은 부카라와 사마르칸트 같은 중요한 도시들을 점령하며 실크로드의 교통 요지를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 세력은 단순한 군사적 확장뿐 아니라, 종교와 문화의 확산을 병행하며 중앙아시아에 새로운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750년, 당나라의 명장 고선지(高仙芝)는 타슈켄트를 정복하고, 그 지역의 투르크계 군주를 처형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군주의 아들이 아랍 세력에 원조를 요청, 이로써 아랍과 투르크 연합군 약 4만 명이 당군과 충돌하게 됩니다.
751년,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지역의 탈라스 강 인근에서 양측의 병력이 맞붙었습니다. 당군은 주로 보병 중심이었던 반면, 아랍-투르크 연합군은 민첩한 기병을 주축으로 한 전술을 펼쳤고, 이는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당군은 궤멸적 패배를 당했고, 일부 수천 명만이 간신히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 이후의 또 다른 흥미로운 후일담은 중국 포로들이 사마르칸트에서 종이 공장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공장에서는 중국에서 오랜 세월 비밀로 유지해온 종이 제작 기술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여부에는 논란이 있지만, 이 시기를 전후로 종이 제작법이 이슬람 세계로 전파되었고, 이는 다시 13세기 유럽으로 확산되어 세계 문명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슬람 문명이 학문과 행정에서 종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탈라스 전투는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닌, 문명 간 주도권을 가른 사건이었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중앙아시아는 이슬람 문화권에 편입되었으며, 중국은 서방 팽창을 중단하고 내부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동시에 종이 기술의 확산을 통해 글로벌 문명의 소통 방식에도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탈라스 전투는 단 몇 줄로 설명하기엔 아까운, 정치적·종교적·문화적 전환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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