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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 분열 : 알리의 암살과 무슬림 내전의 시작

역사학

by danielsung 2025. 5. 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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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알리는 인상적이었다. 순교자로서 그는 살아생전 잃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되찾았다.”
_필립 K. 히티, <아랍인의 역사>

 

 

 

 

 

 

 

 

 

이슬람 세계는 오늘날까지 시아파와 수니파라는 두 주요 종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분열의 뿌리는 7세기 중반, 이슬람 제국 초창기 권력 다툼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특히 661년 1월 24일, 제4대 정통 칼리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암살 사건은 이슬람 세계를 둘로 갈라놓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알리의 칼리프 즉위 과정, 우스만의 죽음과 무아위야의 반란, 그리고 시아파와 수니파의 탄생 배경을 중심으로 이슬람 종파 분열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스만의 통치와 내부 갈등의 심화

 

이슬람 제국은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라 불리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세 번째 칼리프였던 우스만 이븐 아판(재위: 644~656년)의 치세는 외적으로는 큰 영토 확장을 이뤘지만, 내부적으로는 점점 더 심각한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우스만은 주로 자신과 같은 움마야 가문 출신들에게 고위직과 자원을 집중시켰고, 정복 지역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부 역시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편중 정책은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반감을 불러왔으며, 결국 반란으로 이어져 우스만은 656년 살해당하고 맙니다.

 

 

 

알리의 칼리프 즉위와 정통성 논란

 

우스만이 사망한 직후, 무슬림 공동체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를 제4대 칼리프로 선출했습니다. 알리는 예언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칼리프 직위가 무함마드의 혈족에게 귀속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시아투 알리’, 즉 알리의 당파(시아파)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알리가 칼리프로 즉위한 방식에 대해 일부 무슬림들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특히 우스만의 친척이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은 우스만의 죽음을 철저히 수사하고, 그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며 알리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무슬림 간 내전, 즉 ‘제1차 fitna(분열)’가 발생합니다.

 

 

 

알리 vs 무아위야 : 첫 무슬림 내전과 칼리프 체제의 위기

 

알리는 칼리프로서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지만, 무아위야는 우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세력을 키웠습니다. 양측은 기원후 657년 시핀 전투에서 충돌했으나 결정적 승부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알리 진영 내부의 혼란만 가중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칼리프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주의 집단, ‘카와리지(Kharijites)’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알리와 무아위야 모두를 비난하며, 양측 지도자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계획했습니다. 결국 661년 1월 24일, 알리는 카와리지의 일원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그의 죽음은 이슬람 공동체에 치명적인 분열을 남겼습니다.

 

 

 

무아위야의 칼리프 즉위와 수니파의 등장

 

알리 사후, 무아위야는 스스로 칼리프를 자처하며 우마이야 왕조(661~750년)를 세웠습니다. 그는 이슬람 제국의 통치 체제를 중앙집권적으로 강화하고, 세습 왕조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무아위야를 지지한 이들은 무함마드의 언행(순나, Sunnah)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전통을 따르며, ‘수니파(Sunni)’로 불리게 됩니다.

 

수니파는 칼리프 직위가 반드시 예언자의 혈통일 필요는 없다고 보았으며, 공동체의 합의(이즈마)에 따라 유능한 인물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반해 시아파는 여전히 무함마드의 직계 혈족, 즉 알리와 그의 자손들만이 정통 이슬람 지도자임을 주장했습니다.

 

 

 

하산과 후세인 : 시아파 정체성의 강화

 

알리가 사망한 후, 시아파는 그의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를 정통한 지도자로 추대했습니다. 하산은 잠시 무아위야와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그의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에게 복종을 거부하고 680년 카르발라 전투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후세인의 죽음은 시아파에게 신앙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고, 수니파와의 갈등은 더욱 뚜렷한 종교적 분열로 굳어졌습니다. 이 분열은 단지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아니라, 신앙과 정통성, 역사 인식의 문제로까지 확대되며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슬람 종파 분열의 시작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은 단순한 정치 투쟁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 기저에는 정통성, 공동체 리더십, 신앙 해석 방식에 대한 깊은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알리의 암살과 무아위야의 즉위는 그 갈등의 불씨를 키웠고,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반복되는 종파 갈등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시아파와 수니파는 서로 다른 전통과 해석을 바탕으로 이슬람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중동과 세계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종교적 정체성의 핵심 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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