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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카이사르의 브리튼 원정: 로마의 대담한 도전과 첫 만남

역사학

by danielsung 2025. 3. 19.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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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인은 모두 대청(大靑)으로 몸을 물들이고… 자신의 몸에 난… 털을 깎는다.”
_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

 

 

 

 

 

 

 

 

 

로마, 미지의 땅 브리튼을 향하다

 

기원전 55년 여름, 로마 공화국의 권력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유럽 대륙을 넘어 브리튼 섬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브리튼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땅이었으며, 알던 세계의 끝자락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브리튼이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지역의 적대적인 부족들과 연계되어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했습니다.

 

이 원정은 로마의 군사력과 탐험 정신을 보여주는 대담한 시도였지만, 동시에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80척의 운송선과 전함들의 호위를 받으며, 두 개 군단을 이끌고 브리튼 남부 해안으로 출발했습니다. 로마군은 한밤중에 불로뉴(오늘날 프랑스의 항구도시)를 떠나 영국 해협을 건넜습니다.

 

 

 

브리튼 전사들과의 첫 충돌

 

로마 함대가 두브라이(현재의 도버) 근처에 접근하자, 하얀 절벽 위에는 이미 브리튼 전사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로마군의 도착을 예상하고 높은 언덕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불리한 지형에서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는 함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보다 넓고 평탄한 해안에서 상륙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브리튼 전사들은 로마군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빠르게 이동하며 로마군의 새로운 상륙 지점까지 따라가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험난한 상륙 작전

 

로마 군단병들은 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치열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브리튼 전사들은 해변과 얕은 여울에서 로마군을 공격했고, 익숙한 지형을 이용해 기습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은 강력한 군사 장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발리스타(Ballista, 대형 쇠뇌)를 사용해 적을 향해 거대한 화살과 돌을 쏘았고, 이는 브리튼 전사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결국 브리튼 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로마군은 어렵사리 상륙에 성공했습니다.

 

 

 

악천후와 로마군의 철수

 

브리튼 상륙 후, 로마군은 예상치 못한 악천후와 보급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강한 바람과 폭풍우는 로마 함대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무엇보다 카이사르의 기병대가 해협을 건너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기병대 없이 보병들만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로마군에게 큰 약점이었고, 이는 전술적으로도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브리튼에서 장기전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갈리아로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로마군이 고립될 가능성을 우려했으며,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 퇴각을 명령했습니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의 두 번째 브리튼 원정

 

첫 번째 원정이 성공적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다음 해인 기원전 54년 다시 한 번 브리튼을 침공했습니다. 이번에는 더 큰 군대를 동원했고, 기병대와 추가 병력을 포함한 약 800척의 선박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습니다.

 

이번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보다 깊숙이 진격하여 템스 강 북쪽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는 브리튼 부족들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고, 일부 부족장들을 항복시켰습니다. 하지만 브리튼 섬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지형도 험난했고, 로마군이 지속적으로 주둔할 만큼의 보급망을 유지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결국 카이사르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다시 철수했습니다.

 

 

 

로마의 브리튼 정복, 90년 후 실현되다

 

카이사르의 브리튼 원정은 로마군이 이 섬을 영구적으로 점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탐험과 군사 작전은 브리튼을 로마의 관심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90년 후, 기원후 43년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본격적으로 브리튼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단순한 원정이 아니라, 브리튼을 로마 제국의 속주로 만드는 정복 전쟁이었습니다. 이후 로마는 브리튼에서 400년 가까이 통치하며 도로, 도시, 군사 요새 등을 건설하며 문명을 전파했습니다.

 

 

 

카이사르의 브리튼 원정이 남긴 의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 브리튼과 로마의 첫 만남: 카이사르의 원정으로 로마는 브리튼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장차 이곳을 정복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 로마의 군사 전략 실험: 로마군은 바다를 건너 대규모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으며, 이를 통해 해양 원정의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했습니다.
  • 브리튼 부족들과의 관계 형성: 카이사르는 일부 브리튼 부족과 동맹을 맺고, 이들을 로마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대담한 도전, 그리고 후대의 정복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브리튼 원정은 비록 영구적인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로마와 브리튼의 운명을 연결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의 도전은 훗날 로마 제국이 브리튼을 완전히 지배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역사 속에서 하나의 전설로 남았습니다.

 

카이사르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확장을 꿈꾼 개척자였습니다. 그의 원정이 없었다면, 로마와 브리튼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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