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81. 바그다드의 탄생 : 아바스 왕조가 꽃피운 이슬람 황금기의 심장

danielsung 2025. 7. 3. 23:36
반응형

 

 

 

 

“오직 이러한 장소만이 군대와 주민들을 모두 부양할 수 있다.”
_칼리프 알-만수르, 762년

 

 

 

 

 

 

 

 

다마스쿠스를 떠나 동방으로 : 아부 알-아바스의 선택

 

아바스 왕조의 초대 칼리프 아부 알-아바스는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를 버리고 동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이라크 지역,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임시 정착지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닌, 페르시아 문화와 정치 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아바스 왕조가 페르시아적 요소를 많이 흡수하게 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알-만수르와 바그다드 : 새로운 제국의 중심을 꿈꾸다

 

762년, 아부 알-아바스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알-만수르는 보다 영구적인 수도 건설에 나섰습니다. 그는 티그리스 강 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을 선택해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합니다. 이 도시는 ‘마디나트 알-살람(Madinat al-Salam)’ 즉, ‘평화의 도시’라는 공식 명칭을 가졌지만, 사람들에게는 ‘바그다드(Baghdad)’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도시 설계의 혁신 : 원형의 바그다드

 

바그다드는 중세 도시 설계사에서 유례없는 독창적인 형태를 보여줍니다. 지름 2.6km에 달하는 원형 성곽 안에 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네 개의 동일한 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원형 구조는 중앙집중적인 행정체계와 도시의 방어력 강화를 동시에 염두에 둔 설계였습니다. 도시 중심에는 칼리프의 궁전과 대모스크가 위치해 제국의 권위와 종교적 상징성을 동시에 드러냈습니다.

단 4년 만에 완성된 이 도시는, 정치적 목적뿐 아니라 예술과 과학, 종교와 철학이 함께 숨 쉬는 다차원적 공간이 되었습니다.

 

 

 

지정학적 이점 : 번영을 위한 최적의 입지

 

바그다드가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입지적인 이점이 컸습니다. 이 도시는 동서 무역로를 잇는 주요 캐러밴 경로와 인접해 있었으며, 티그리스 강을 따라 바스라 항구와 페르시아 만으로의 수로 접근도 용이했습니다. 이는 상업 활동을 촉진하고, 다양한 문화권의 인적 자원이 자연스럽게 유입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바그다드 주변에는 비옥한 농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대도시의 방대한 인구를 안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 자립 기반과 교통의 요충지라는 두 요소가 결합하면서 바그다드는 단숨에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세계 최대 도시로의 성장과 문화적 융성

 

8세기 말, 바그다드는 성곽을 넘어서 팽창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아바스 왕조는 이곳에 웅장한 궁전과 행정기관을 세웠고, 이는 전 세계에서 상인과 학자, 장인들을 끌어들이는 자석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지혜의 집(Bayt al-Hikma)’이라 불린 학문 기관은 고대 그리스와 인도, 페르시아의 학문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발전시키는 지식의 중심지였습니다.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취가 이루어졌으며, 이는 유럽 중세 학문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바그다드, 이슬람 황금기의 상징

 

바그다드는 단순한 수도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이 도시는 아바스 왕조가 이루고자 했던 새로운 이슬람 문명의 비전이 실현된 공간이자, 동서양을 연결하는 문화의 교차로였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학문 모든 면에서 이슬람 세계의 정점을 상징했던 바그다드는, 오늘날에도 중세 이슬람 황금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