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77. 아바스 왕조의 등장 :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과 이슬람 제국의 결정적 전환점

danielsung 2025. 5. 2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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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를 전복시킨다.”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 : 내부 분열과 불만의 축적

 

661년부터 시작된 우마이야 왕조는 약 한 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며 정치적·군사적 팽창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8세기에 접어들며 왕조의 권위는 점차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이슬람 공동체 내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점입니다.

 

또한 우마이야 칼리프들은 칼리프 자리를 일종의 세습 군주제처럼 다루었고, 이로 인해 아랍인 중심의 지배체제에 대한 비(非)아랍 무슬림들의 불만이 커졌습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많은 페르시아계와 기타 민족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무슬림으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차별은 곧 체제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747년 반란의 발발과 아바스 왕조의 부상

 

이러한 불만은 마침내 747년, 페르시아 호라산 지역에서의 반란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반란은 빠르게 서진하며 이라크 지역까지 퍼졌고, 무함마드의 숙부인 알-아바스의 후손인 아부 알-아바스 앗-사파르가 지도자로 추대됩니다. 그는 반란군에 의해 새로운 칼리프로 선언되며, 새로운 왕조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이로써 아바스 왕조(749~1258년)가 탄생하게 됩니다.

 

 

 

자브 전투와 우마이야 왕조의 종말

 

750년 1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브 강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은 참패하였고, 아바스 세력은 이슬람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아바스의 장군 압둘라 이븐-알리는 곧이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우마이야 최후의 칼리프인 마르완 2세는 이집트로 도망쳤으나, 결국 8월에 살해당합니다.

 

우마이야 왕조의 저항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압둘라는 같은 해 6월 25일, 자파 근처의 아부 푸트루스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인사 80명을 초대한 연회를 개최하고, 그 자리에서 모두를 학살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죽은 자들의 시신을 파내 태우는 등의 모욕적 행위는 새로운 왕조가 얼마나 철저히 구 왕조를 제거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바스 왕조의 체제 변화와 개방성

 

아바스 왕조의 수립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닌, 이슬람 제국의 정체성 변화를 의미하는 정치적 대전환이었습니다. 아바스는 더 이상 특정 민족인 아랍인만을 우대하지 않았고, 이슬람을 믿는 모든 개종자에게 관직 참여의 기회를 열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관료제도, 학문, 문화 면에서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여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분열된 이슬람 세계 : 후우마이야 세력의 귀환

 

우마이야 왕조가 몰락한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마이야 가문 출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브드 알-라흐만은 서쪽 끝 스페인(알 안달루스)으로 도망쳤고, 이곳에서 우마이야 계열의 독립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이는 이슬람 세계가 더 이상 정치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공동체가 아님을 뜻하며, 이후 이슬람 역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왕조와 정파가 병존하는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이슬람 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연 아바스 혁명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과 아바스 왕조의 등장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이슬람 문명의 다민족·다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폭력 속에서 태어난 아바스 왕조는, 초기에는 급진적 개혁과 포용정책으로 지지를 얻었고, 이후 이슬람 문화의 황금기를 이끄는 동력이 됩니다.

 

이 사건은 중세 이슬람 세계의 거대한 분수령이자, 오늘날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역사에 큰 영향을 남긴 중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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