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죽음 : 로마 제국의 분열과 쇠퇴
“로마 제국은 야만인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_조시무스, <새로운 역사> 중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죽음과 분열된 제국
395년, 로마 제국을 통일했던 테오도시우스 대제가 사망하자 로마 세계는 깊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수년간의 내전을 거쳐 간신히 제국을 하나로 묶었던 테오도시우스의 통일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분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는 사후, 두 아들에게 제국을 양분해 남기는데, 어린 아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를,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를 통치하게 됩니다. 이 결정은 향후 로마 제국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됩니다.
민중이 느꼈던 두려움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사후, 로마 제국은 다시는 하나의 황제 아래 통일되지 못했으며, 이후의 역사는 두 제국의 점진적인 분리와 쇠퇴를 상징하게 됩니다.
미숙한 황제 호노리우스와 서로마의 몰락
서로마를 맡게 된 호노리우스는 당시 고작 10세에 불과한 어린 황제였습니다. 실질적인 정치는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가 담당했으며, 특히 그는 406년 야만족 라다가시우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제국을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위기는 점차 고조되었고, 408년, 호노리우스는 모반 혐의로 스틸리코를 처형하면서 제국의 기반은 심각하게 흔들리게 됩니다.
이 결정은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군사적 지도력 상실로 이어졌고, 결국 410년 8월 24일, 고트족의 왕 알라리크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충격적인 사태가 발생합니다. 이는 고대 로마의 심장부가 800년 만에 외세에 의해 함락된 사건으로, 당시 전 로마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호노리우스는 이후에도 지속적인 좌절과 혼란 속에서 통치를 이어갔지만, 제국은 점차 반란과 왕위 찬탈자들로 인해 내부적으로 붕괴해갔습니다. 423년 호노리우스가 죽었을 때, 서로마 제국은 사실상 더 이상 통합된 정치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아르카디우스의 통치와 동로마의 다른 길
동로마를 통치한 아르카디우스는 형식적으로는 제국의 황제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한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고문서와 사료에 따르면, 그는 의지가 약하고 타인의 영향을 쉽게 받는 성격이었으며, 궁정 내 권력자들과 그의 아내가 정치 전반을 좌지우지했다고 전해집니다.
아르카디우스는 통치자로서의 역량보다는 신앙심 깊은 기독교도로서의 삶에 더 몰두했으며, 국가 운영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408년, 그는 궁정 내 음모와 권력 다툼이 난무하던 상황 속에서 제국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동로마는 그의 통치 중에도 서로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행정 체계를 유지하며 급격한 붕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분열된 로마, 두 제국의 상반된 운명
395년의 제국 분열은 단순한 행정 구분이 아닌, 향후 서로마와 동로마 제국의 상반된 역사적 경로를 암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서로마는 계속된 내부 불안과 외적 침입, 지도력 부재로 인해 불과 한 세기 후인 476년,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반면 동로마는 이후 비잔티움 제국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천년 가까이 지속되는 독자적인 역사를 써 내려갑니다.
이 시기는 황제의 자질, 정치적 판단, 지도자의 존재 여부가 제국의 흥망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입니다. 어린 황제와 무력한 통치는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었고, 이는 오늘날에도 정치 리더십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한 제국, 두 미래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사망은 단순한 시대의 끝이 아닌, 로마 제국의 분열과 쇠퇴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두 아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통치하며, 로마는 더 이상 단일 제국이 아닌 두 개의 상이한 운명을 가진 국가로 나뉘게 됩니다. 이 분열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고대 제국의 정치 구조와 인간 중심의 역사의 흐름을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