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바르 코크바의 반란 :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진입과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바르 코크바 반란으로 로마는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교를 금한다.”
로마 제국은 그 거대한 영토만큼이나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가 얽혀 있는 다민족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지역이 제국의 통치에 순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유다 속주(현 이스라엘 지역)는 로마 제국에게 오랜 시간 골칫거리였으며, 수차례에 걸쳐 반란과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의 가장 치열하고 파괴적인 충돌, 즉 바르 코크바의 반란과 그 여파로 이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이산)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끊이지 않는 유다의 반란과 하드리아누스의 통치
로마의 속주 중 하나였던 유다는, 유일신 신앙과 강한 민족적 자부심으로 인해 로마의 다신교 중심적 통치와 끊임없이 충돌했습니다. 특히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며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을 종결지은 이후에도, 지역의 불안정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117~138년)는 비교적 안정된 평화의 시대였지만, 유일하게 전면적인 대규모 전쟁이 발생한 지역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130년, 하드리아누스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하여 도시를 재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의 결정은 유대 사회를 또다시 들끓게 만들었습니다.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와 유대인의 분노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단순히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성과 종교적 중심마저 바꾸려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개명하고, 유대인들의 제2성전이 있던 자리에 로마의 주신인 유피테르 신전을 세울 계획이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니라, 정체성과 신앙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에 반발한 유대인들은 다시 한 번 무장 봉기를 준비했고, 마침내 하드리아누스의 결정은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라는 거대한 저항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 독립의 꿈과 비극적 최후
132년, 유대 민족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의 지도 아래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당시 많은 유대인들로부터 ‘메시아’로 여겨졌으며, 반란군은 단기간 내에 예루살렘을 포함한 여러 지역을 점령하고 사실상 독립 국가를 수립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이를 묵과하지 않았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소집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유대는 철저히 초토화되었습니다. 최후의 저항은 요새 도시 베타르(Betar)에서 벌어졌으며,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처참한 학살로 끝났습니다. 약 5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은 그 참상을 짐작케 합니다.
유대교 탄압과 아일리아 카피톨리나의 재편
반란 진압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유대인 사회를 완전히 무력화하기 위해 강경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토라(율법) 교육이 금지되었고, 성스러운 유대교 두루마리들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출입이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그 도시는 완전히 로마화된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개편되었습니다.
또한, 유다 속주는 이제 ‘시리아 팔레스티나(Syria Palaestina)’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이는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시도였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이 결정은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유대인을 ‘보이지 않게’ 만들려는 제도적 박해였습니다.
디아스포라의 시작: 유대인의 전 세계 이산
바르 코크바의 반란과 그 진압은 단순한 하나의 반란 사건이 아닌, 유대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노예로 팔려 외국으로 유배되었고, 일부는 로마 제국 내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는 중동과 지중해 지역을 넘어, 유대인 공동체가 유럽, 북아프리카 등지에 뿌리내리게 되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발점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이후 수세기 동안 유대인은 자신들의 고향인 유다(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한 채, 이방의 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단지 물리적인 이산만이 아니라, 문화적·종교적으로도 고향을 잃은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이 상황은 1948년 이스라엘 현대 국가의 탄생까지 이어졌으며, 디아스포라는 유대 민족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잊히지 않는 비극, 그리고 민족의 기억
바르 코크바의 반란은 단순한 실패한 저항이 아닙니다. 그것은 민족의 정체성과 신앙을 지키려는 치열한 투쟁이었고,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쓰러진 하나의 공동체의 외침이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강경한 탄압은 일시적으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유대인의 고통과 기억은 이후 수천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예루살렘과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중동 문제와 유대인의 정체성, 그리고 세계사 속 민족 운동의 맥락에서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와 바르 코크바의 충돌은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