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즉위 : 로마 제국의 전략적 전환
“그리고 나서 그는 브리튼으로 출발해, 여러 일을 바로잡고 최초로 성벽을 지었다.”
_<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중
로마 제국의 역사는 수많은 황제들의 통치로 이어졌으며, 그 중에서도 하드리아누스(Hadrian)는 전성기 로마의 방향을 '팽창'에서 '방어'로 전환한 황제로 평가받습니다. 트라야누스의 정복 전쟁으로 최대 영토를 이룩한 직후, 하드리아누스는 전략적인 후퇴와 국경 강화라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글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즉위 과정부터 그의 주요 정책, 그리고 후대에 큰 영향을 남긴 ‘하드리아누스 성벽’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 의문의 계승 과정
서기 117년 8월, 터키 남부 실리시아에서 트라야누스 황제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의 황위 계승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당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후원자였고, 일각에서는 트라야누스가 생전에 이미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로마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의 기록에 따르면, 상황은 더 복잡했습니다.
디오에 따르면, 트라야누스의 아내 플로티나 황후는 남편의 죽음을 일시적으로 숨긴 채, 로마 원로원에 하드리아누스를 양자로 삼았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먼저 보냈습니다. 이 전략적인 조치로 하드리아누스의 계승이 사실상 확정된 이후에야 트라야누스의 사망이 공식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황위 계승이 단순히 혈통이 아닌 정치적 수단과 지지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영토 확장: 로마 제국의 정점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서기 97~117년)은 로마 제국의 영토가 사상 최대에 이르렀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현재의 루마니아에 해당하는 다키아(Dacia)를 정복했고, 동방으로는 메소포타미아까지 진출했습니다. 특히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선 영토까지 제국에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확장은 동시에 거대한 행정적 부담과 군사적 긴장을 수반했습니다. 제국은 너무 넓어졌고, 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방어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정책 전환: 팽창에서 방어로
하드리아누스는 황제가 되자마자 제국의 영토 확장 정책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는 트라야누스가 어렵게 얻은 다키아 지방(도나우 강 북부 지역)을 포기하고, 동방의 새로운 정복지 역시 방기했습니다. 대신 유프라테스 강을 다시 동쪽 국경선으로 삼아 제국의 경계를 재정비했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당시로서는 용기 있는 후퇴로 보일 수 있었지만, 실상은 더 큰 위기를 방지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무리한 확장보다 기존 영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통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북방 국경의 방어: 독일 국경과 ‘하드리아누스 성벽’
하드리아누스는 북쪽 국경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책을 추진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도나우 강과 라인강 사이의 485km 길이의 방벽입니다. 이는 흙과 목재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건설되었으며, 로마군의 주둔과 침입 차단을 위한 시설로 기능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유명한 방어 건축물은 ‘하드리아누스 성벽’(Hadrian’s Wall)입니다. 이 성벽은 브리튼(현 영국) 북부를 가로질러 약 128km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10년이 채 되지 않아 완성되었습니다. 일정 간격으로 감시탑과 주둔군 요새가 배치되어 있어, 로마의 북방 국경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성벽은 단지 군사적인 기능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존재감을 북방 민족들에게 과시하고, 국경 내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징적 의미도 지녔습니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유산과 현대적 의미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오늘날에도 일부 구간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지 로마의 국경 방어 정책을 보여주는 유적이 아니라, 고대 로마의 공학 기술과 행정 시스템이 얼마나 발전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제국이 무작정 확장을 추구하는 대신, 내실을 다지고 지속 가능한 통치를 위해 방어적 전략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정책 전환의 상징으로 평가됩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이러한 방향 전환은 이후 제국의 전략과 사상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리더십과 로마의 지속 가능성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현실적인 통치 전략을 중시한 실용주의자였습니다. 무리한 확장 대신 제국의 경계를 강화하고, 내부 안정과 효율적인 통치를 지향한 그의 정책은 로마 제국이 더 오래 존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특히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단순한 방어 구조물이 아닌, 로마 제국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 역사적 전환점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