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불타는 로마와 네로 황제 : 대화재가 불러온 의혹과 박해
“네로는 기독교도들에게 죄를 씌우고 가장 심한 고문을 가했다.”
_타키투스, <연대기>
서기 64년, 한여름의 로마는 상상할 수 없는 재난을 맞이합니다. 불길은 도시를 휩쓸며 로마 제국의 심장부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였을까요, 아니면 권력자의 음모였을까요? 그리고 그 여파로 왜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게 되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로마 대화재의 전개, 네로 황제에 대한 의혹, 기독교인 박해의 시작, 그리고 도시 재건과 도무스 아우레아의 건설까지, 이 사건이 고대 로마 역사에 남긴 거대한 흔적을 살펴보겠습니다.
한밤중에 시작된 불길, 로마를 집어삼키다
서기 64년 7월의 어느 밤, 로마의 중심지였던 키르쿠스 막시무스 인근의 상가에서 불이 나기 시작합니다. 불길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졌고, 9일 동안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 화재로 인해 로마의 10개 행정구역 중 7곳이 피해를 입었고, 그 중 3곳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약 200만 명에 달하던 인구 대부분이 집을 잃는 초유의 사태였습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로마 시민 다수가 거주하던 인술라이(아파트형 공동주택)가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습니다. 화염은 유서 깊은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전과 베스타 여신의 신성한 화덕까지 삼켜버렸습니다.
당시 9세였던 역사학자 타키투스는 후일, 이 화재로 로마의 3분의 2가 파괴되었다고 기록하며, 그날의 참혹함을 증언합니다.
네로는 리라를 켰을까? 황제에 대한 불신과 음모론
불길이 타오르던 그 밤, 황제 네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후대 역사서에 따르면 그는 도시가 불타는 모습을 높은 언덕에서 감상하며 리라를 켰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무책임한 폭군’의 전형으로 기억되며 네로의 악명을 강화했지만,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증거는 없습니다.
실제로 네로는 화재 직후 궁전을 개방해 이재민을 수용하고, 긴급 구조 활동을 지시하는 등 초기 대응에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의 일부 지역을 철거하고 자신의 황금궁전 ‘도무스 아우레아’를 짓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불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습니다.
도무스 아우레아는 약 142헥타르(도시 면적의 약 3분의 1)를 차지한 거대한 궁전으로, 인공 호수와 황금으로 장식된 벽, 회전하는 식당 등 상상을 초월하는 호화로움을 자랑했습니다. 이 궁전의 등장은 ‘혹시 화재가 그의 도시 재설계 계획에 필요한 구실이었나?’라는 의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범인은 기독교인? 최초의 조직적 박해가 시작되다
화재의 정확한 원인은 오늘날까지도 불분명합니다. 자연발화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황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역사학자 수에토니우스도 네로가 방화를 지시했다고 서술했으나, 그는 원래 네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여론을 돌리기 위해 네로는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네로는 로마 내에서 소수였던 기독교인들에게 불을 지른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당시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여겨지며 여전히 낯설고 이상한 신앙으로 간주되었고, 일부는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는 극단적 신자들도 있었습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고, 그들을 짐승의 가죽으로 묶어 야수에게 찢기게 하거나, 십자가에 못박아 화형에 처하는 등 잔혹한 처벌을 가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최초의 조직적 기독교 박해로, 이후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되는 로마 제국 내 기독교 탄압의 서막이었습니다.
도시 재건과 네로의 대규모 도시계획
화재 이후 네로는 도시를 다시 설계하고 건축법을 정비하는 등 새로운 로마를 세우는 데 착수했습니다. 건축물은 이제 불에 잘 타지 않는 돌로 지어야 했으며, 거리와 블록은 일정한 간격으로 구획되었습니다. 또한 화재 발생 시 대피할 수 있도록 방화 공간을 확보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네로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과도한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는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의 반감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화재로 인해 시민들의 삶은 파괴되었지만, 황제는 그 재앙을 ‘개인의 영광’을 위한 기회로 이용한 셈이었습니다.
로마 대화재가 남긴 교훈과 역사적 의미
로마 대화재는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권력과 책임, 종교적 희생양, 도시 재건이라는 복합적인 문제를 동반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네로 황제의 통치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고, 훗날 그의 몰락의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또한 이때 시작된 기독교 박해는 수백 년 동안 이어졌으며,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뿌리내리고 퍼지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기독교인들의 존재는 이후 순교자의 전통을 낳았고, 이는 교회의 정체성과 역사 속 위치를 더욱 공고히 만들었습니다.
불꽃 속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64년의 로마 대화재는 단지 도시의 붕괴만이 아닌, 로마 사회의 균열과 권력의 어두운 이면, 그리고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 맞물린 역사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불확실한 정보와 권력자의 책임 회피가 어떻게 약자에게 향할 수 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과연 과거의 로마처럼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지는 않은지, 묻게 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