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39. 키케로의 죽음 : 위대한 웅변가의 마지막 경고

danielsung 2025. 3. 22.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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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화해는 키케로의 살해로 이어진다.”

 

 

 

키케로

 

 

 

고대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 시대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기, 한 지식인의 비극적인 최후가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남게 되었습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그는 단순한 웅변가가 아닌, 로마 정치와 철학, 법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혀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비판했고, 결국 그 혀와 손이 잘리는 최후로 이어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키케로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가 남긴 역사적 의미를 조명해봅니다.

 


 

키케로의 마지막 순간: 도망칠 수 없던 지식인

 

기원전 43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시에 따라 키케로의 이름은 제2차 삼두정치의 ‘추방자 명단(proscriptio)’에 올랐습니다. 이는 곧 그가 법적 절차 없이 제거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암살자들이 그의 은신처에 도착했을 때, 키케로는 가마를 타고 배가 있는 해안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암살자 중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키케로가 법정에서 변호해준 호민관 포필리우스와 백부장 헬렌니우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방문은 은혜가 아닌 복수의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64세였던 키케로는 지쳐 있었고, 초췌한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칼은 그의 내면 상태를 반영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군인이여, 그대가 하고 있는 일에는 올바른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으나, 나를 올바르게 죽이도록 애써 보게.”

 

그리고 스스로 목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를 비판한 혀와 손을 잘라 로스트라 연단에 전시하게 했습니다. 이는 단지 육체적 죽음 이상의 상징적 억압이었습니다 —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개 처형이었죠.

 


 

귀족도 아닌 자의 정치적 도전: 키케로의 이례적인 경력

 

키케로는 귀족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63년, 로마의 최고 관직인 집정관(Consul)에 올랐습니다. 그는 탁월한 웅변과 논리적 사고, 그리고 정치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로마 정계에서 입지를 넓혔습니다.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는 카틸리나 음모 사건을 해결한 것입니다.

 

철학자이자 법률가로서 그는 로마의 공화정 정신을 누구보다 신봉했습니다. 그런 그가 카이사르의 독재에 반대했지만, 그의 암살에는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신중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키케로는 결코 충동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오용하기 시작하자, 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필리피카>: 안토니우스를 향한 마지막 투쟁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이후, 로마는 또 다른 권력의 공백을 맞았습니다. 그 틈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군사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맞서 키케로는 연설집 <필리피카(Philippicae)>를 발표하며, 안토니우스를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며, 안토니우스를 폭군이자 국가의 적으로 몰았습니다. 그 결과, 로마 원로원은 실제로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 번 말의 힘으로 싸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화해하면서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권력 유지가 우선된 그들의 정치적 거래 속에서, 키케로는 협상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죽은 후에도 남은 상징: 손과 혀의 의미

 

키케로의 사체에서 잘려나간 손과 혀는 로마의 로스트라(Rostra) 연단에 전시되었습니다. 이곳은 과거 키케로가 수많은 군중 앞에서 정의와 공화정의 가치를 설파하던 장소였습니다. 그의 신체 일부가 그 연단에 전시된 것은, 말 그대로 그가 가장 사랑했던 장소에서 조롱당한 셈이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말을 했던 혀”와 “비판을 기록한 손”을 가져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말과 글의 힘을 억누르려는 권력자의 상징적 행동이었습니다.

 


 

뒤늦은 재평가: 옥타비아누스의 회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곧 다시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기원전 31년)에서 안토니우스를 무찌릅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됩니다.

 

재미있게도, 그는 훗날 키케로를 두고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조국을 사랑했던 학식 높은 이.”

 

키케로는 죽은 후에야 공화정의 수호자로서 재조명되었고, 그의 철학과 연설은 훗날 유럽의 법률 체계, 정치 철학, 수사학 교육에까지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키케로가 남긴 유산: 말과 사상의 힘

 

키케로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처형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권리, 그리고 철학적 진실을 향한 끊임없는 열망이 어떻게 권력에 의해 짓밟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민주주의와 공화정,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을 논할 때 자주 언급됩니다.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혀는 언제나 위험하다.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이 역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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