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폼페이우스의 최후: 로마에서 이집트까지, 몰락한 로마 최고의 장군
“그들은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자르고 몸은 옷을 벗겨 배 밖으로 던졌다.”
_플루타르코스, <폼페이우스의 일생>
한때 가장 강력했던 로마의 지도자
폼페이우스 마그누스(폼페이우스 대제)는 한때 로마 공화국에서 가장 강력한 장군이자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지중해 해적을 소탕하고,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동방에서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경쟁 속에서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며 내전이 발발했고, 로마 공화정의 두 거물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파르살루스 전투: 몰락의 시작
기원전 48년, 그리스 북부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는 원로원의 지원을 받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었지만, 카이사르의 기민한 전략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패전 후 폼페이우스는 동방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이집트로 향했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피난처를 요청했으나, 그의 운명은 이미 잔혹하게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집트 왕실의 배신
폼페이우스의 요청을 받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궁정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왕의 자문단을 이끌던 환관 포티누스는 위험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폼페이우스를 보호하면 카이사르의 분노를 살 것이고, 그렇다고 거절하면 장래에 폼페이우스가 다시 힘을 회복하여 복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 여긴 방법, 즉 폼페이우스를 암살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장군 아킬라스는 두 명의 로마 출신 암살자와 함께 작은 배를 준비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충직한 하인 필리푸스와 함께 배에 올랐고, 그는 자신을 맞이하는 이들이 적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배신과 암살: 폼페이우스의 마지막 순간
배가 해안의 얕은 곳으로 들어서자, 암살자들은 갑자기 폼페이우스의 등을 찔렀습니다. 그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저항할 틈도 없이 칼에 쓰러졌으며, 결국 머리가 베어졌습니다. 그의 시신은 바다에 버려졌고, 남겨진 것은 그의 충직한 하인 필리푸스뿐이었습니다. 필리푸스는 주인의 시신을 거두지도 못한 채 해변에서 초라한 장작더미를 만들어 간소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의 또 다른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때 강력했던 로마의 영웅은 정적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동방의 작은 왕국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입니다. 이는 그의 몰락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카이사르의 반응: 연민인가, 정치적 계산인가?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지 나흘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도착했습니다. 이집트의 지도자들은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치며 카이사르에게 환심을 사려 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 장면을 보고 분노와 혐오를 느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위대한 로마 장군이 이방인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을 개탄하며, 고개를 돌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반응이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폼페이우스의 죽음은 카이사르에게 큰 이득이 되었습니다. 그의 최대 경쟁자가 사라짐으로써, 그는 로마의 유일한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계기로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의 정치적 개입을 본격화할 명분을 얻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이집트의 운명
폼페이우스의 살해를 지시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예상과 달리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는 데 실패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오히려 그의 누이이자 공동 통치자인 클레오파트라를 지지하며, 이집트의 정국을 개편하는 데 적극 개입했습니다.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권력을 잃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연인이자 동맹자가 되며 이집트의 운명을 새롭게 써 내려가게 됩니다.
폼페이우스의 비극적 최후는 단순한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장을 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카이사르는 명실상부한 로마의 지배자로 자리 잡았고, 이후 독재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 폼페이우스: 승리와 몰락의 아이콘
폼페이우스는 로마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대제(Magnus)'라는 칭호를 받았고, 공화정 후반부의 정치 무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후, 그는 한낱 도망자로 전락했고, 결국 배신당하며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후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고, 그의 죽음 이후 로마는 제국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의 삶과 죽음은, 권력의 부침과 역사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로마의 그림자로 남은 폼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이야기는 단순한 패배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장군이었고, 한때 로마를 지배했던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를 비극적인 길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는 동방의 작은 왕국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로마 공화정의 종말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패배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역사 속에서 승리와 몰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