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자진하여, 나는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자유롭게 했다.”
_<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들>, 비문, 14세기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을 장식한 혼란의 시기를 지나, 로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그 중심에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조카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가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가 어떻게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제정 로마의 시작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그의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겨우 18세에 불과했습니다. 나이와 경험 면에서 부족해 보였지만, 그는 놀라운 정치적 감각과 결단력으로 카이사르의 유산을 이어받아 빠르게 세력을 확장합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동료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구성하며 권력을 분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연합은 오래가지 않았고, 안토니우스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자, 옥타비아누스는 더 이상 그를 동맹으로 간주하지 않게 됩니다. 이 갈등은 결국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권력을 손에 쥔 후에도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노골적인 독재자가 되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전통적인 공화정의 형식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배려이자, 실질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기적인 접근이었습니다.
기원전 27년 1월, 그는 스스로 원로원에 권력을 반납하겠다며 연극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원로원은 그에게 오히려 속주 통치권과 군사 지휘권을 부여하며, 그의 권력을 공식화합니다. 동시에 옥타비아누스는 ‘프린켑스(Princeps)’와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새로운 칭호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공화정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사실상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기리기 위해 자신의 이름에 ‘카이사르’를 덧붙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이름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서, 황제를 상징하는 보편적 칭호로 자리 잡게 됩니다. 훗날 게르만의 ‘카이저(Kaiser)’, 러시아의 ‘차르(Tsar)’ 등도 이 이름에서 유래하게 되죠.
그의 집 문에는 월계관이 걸려 있었고, 이는 고대 로마에서 영광과 권력을 상징하는 표시였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제1시민'에 불과했지만, 그 실질적 권력은 원로원 위에 있었고, 누구도 그에게 도전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와 근위대의 지휘권을 유지하며, 로마의 실질적인 군사 지도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그는 원로원과 시민들을 압도하는 권위를 갖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원로원은 그를 ‘임페라토르(Imperator)’, 즉 최고 군사 지휘관으로 인정하며 충성 서약을 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전통적인 칭호와 정치 형식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권력을 쥔 황제와 다름없는 위치였습니다. 로마는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 중심의 제국 체제로 접어든 것입니다.
이제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번영한 시기 중 하나인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시작합니다. 그의 치세 동안 로마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광대한 제국으로 팽창해 갔으며, 문화와 예술도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로마 제정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 전환점이었고, 이후 400년 이상 이어질 로마 제국의 정치 모델을 마련한 셈입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단순한 후계자가 아니라, 로마의 운명을 바꾼 정치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와 달리, 공화정의 형식을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권력을 집중시켰고, 그 결과 로마는 중앙집권적인 황제 체제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감각, 상징의 활용, 제도 설계 능력은 모두 제국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로마 제국의 탄생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악티움 해전의 승리보다 더 중요하게 아우구스투스 체제의 수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로마 제국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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